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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주 교수 칼럼] 박애주의와 오지라퍼

[박미주 교수 칼럼] 박애주의와 오지라퍼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있다면, 누구나 스스로가 좋은 사람의 무리에 속하고 싶어 한다. 우리 마음속에는 박애주의적 태도와 염세주의적 태도가 공존한다. 다만, 상황에 따라 드러나는 모습은 다르기에 어떤 이에게는 따뜻하고 포용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날카롭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박애주의가 주는 따뜻하고 선한 이미지를 좋아한다. 인류 전체의 평등한 사랑과 연대, 사회적 약자 보호, 인류 복지 증진은 모두 가치 있는 목표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가 때때로 인간은 스스로 삶을 결정하는 존재라는 인본주의적 사고와 섞여 과도하게 표현될 때, 누군가에게는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으로 오해 받기도 한다.  

반대로 염세주의적 접근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기대 대신 한계와 본성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이런 시각은 때때로 냉정하거나 부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그 사람의 본래 성향이나 사고 기반에서 나온 것이지, 선과 악을 단순히 나누어 평가할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최소한의 정의와 공정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며 살아왔다. 그런데 때로는 이러한 정의 역시 박애적이냐, 염세적이냐 하는 단순한 구분 속에서 오해 되거나 축소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최소한의 정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이지도, 지나치게 비관적이지도 않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지켜내는 균형 감각이다.  

세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선과 악의 기본적인 기준은 존재해야 한다. 한쪽의 단면만 보고 성향을 박애냐 염세냐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문명과 문화는 누군가의 정의로운 선택과 용기가 축적된 결과이다. 이는 후손들에게 이어져야 할 사회적 기반이며, 단순한 선입견과 분류적 사고로 평가할 대상이 아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의 태도와 사고에서 무엇이 합리적이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의 따뜻한 배려를 오지랖으로 몰아붙이거나, 누군가의 냉정한 분석을 차가움으로 단정하는 실수를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따뜻함이 곧 박애주의의 전부가 아니고, 냉정함이 곧 염세주의의 표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태도의 본질과 그 행동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다.  



때로는 뾰족해 보이는 한 마디가 사회를 바르게 세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 글쓴날 : [2025-11-10 22:24: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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